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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제임스 매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대결은 미국 건국의 근본이념을 규정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들의 대결은 미국 정당정치의 기원이 되는 공화파과 연방파를 낳았고, 1800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로 미국의 참여 민주주의를 여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같이 두 인물의 대립은 미국의 정치적 지형을 결정하는 일대 사건이었음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립 원인에 대한 학문적 규명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본 연구는 두 인물의 분쟁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개인적, 감정적, 정치적 차이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철학적 입장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가정에서 출발한다. 본 연구는 특히 이들의 정치철학적 차이는 공화국에서 여론의 역할과 본질에 대한 다른 견해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여론에 대한 매디슨과 해밀턴의 상이한 견해는 특히 1790년대 초 미국 경제적 기틀에 대한 비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국가은행설립, 정부차원의 상업 및 제조업 지원, 국공채의 영속화 등 거의 모든 정치적 쟁점에서 해밀턴과 입장을 달리하는 매디슨은 사실 하나의 정치철학적 원칙, 즉 여론의 주권성을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매디슨 공화주의의 승리는 궁극적으로 여론의 정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매디슨이 신뢰했던 여론은 현재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변덕스럽고 무지하며, 감성에 치우치는 여론은 아니다. 매디슨이 추구하고 있는 여론의 정치는 어떤 정치인가?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본 연구는 해밀턴의 공화주의와 매디슨 공화주의의 비교를 시도했다. 해밀턴의 공공선의 정치는 매디슨의 여론 정치를 올바로 규정할 수 있는 좋은 잣대가 된다고 본 것이다.
매디슨적 공화주의와 해밀턴적 공화주의 대조는 그들이 지향하는 공화국 정부의 성격과 공화국의 구성원으로서 인민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평가로 구성될 수 있다. 특히 공화국의 인민들이 그들 스스로를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들의 견해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 해밀턴은 매디슨의 광역 공화국과 대의제라는 해결책이 다수의 폭정 문제를 예방하는 데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반면, 매디슨은 해밀턴의 공공선의 정치가 허울뿐이고 결국 소수의 사적 이익을 위한 정치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결국 여론의 주권적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해밀턴은 여론의 역할을 부패하지 않은 훌륭한 대표를 선출할 권한으로 해석한 반면, 매디슨은 여론이 헌법을 수호하는 최종적인 권한으로 이해했다. 해밀턴은 물론 매디슨도 변화무쌍한 여론이 소위 공적 이성을 발휘하여 언제나 훌륭한 판단으로 귀결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밀턴과 매디슨은 갈등하는 국가정책을 결정할 최종적인 권한, 혹은 이것의 위헌 여부를 결정할 최종적인 권한을 소수의 엘리트에 부여하느냐 혹은 인민 다수의 판단에 의존하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대조된다.
해밀턴은 파당적 이해관계 난립, 집단적 열정의 전염, 입법부에서 선동적 정치의 등장 등과 같은 새로 건국한 공화국의 위험성을 다양화된 상업적 공화국의 정부 내부에서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제도의 수립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해밀턴은 특히 국가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국민들에게 신뢰와 복종의 습관을 고취시킬 수 있는, 독립적이고 활기에 찬 행정부의 역할을 통해 “이성적이고 영속성 있는 공화국의 의지”를 달성하고자 했다. 대조적으로 매디슨의 해결책은 대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들의 활동을 여론의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 매디슨은 다수 파당의 가능성을 감소시키려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러한 장치가 사상의 교환과 아울러 인민 대중의 계몽되고, 보다 개선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유리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의 목적은 사회 내의 이익과 정열의 균형을 시도하는 것이다.
해밀턴 식의 공화주의는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고 그들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보장해 주는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들에 의존한다. 그는 시민들 사이의 정치 참여를 격려할 필요성이나 정치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해밀턴은 오로지 정치 참여의 과열은 프랑스의 예가 완벽히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적 불안과 선동을 초래하는 것으로만 보았다. 반면, 매디슨에게 그러한 시민의 정치적 역할은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그들을 대표하고 있는 더 나은 종류의 사람을 선택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후견인으로서의 의무를 갖는다. 이런 역할을 선거에만 국한되는 간헐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해밀턴과 매디슨은 모두 그들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교양 있는 엘리트에 상당 정도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밀턴의 경우, 이 엘리트는 스승 이상으로 존경받고, 신뢰받는 귀족적 정치가의 유형을 띄고 있는 반면, 매디슨의 경우 이 엘리트는 시민들의 이해의 습관을 기르고 관습과 풍습을 정제하며, 시민들이 자기 지배의 원칙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도록 이들을 교육하는 시민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엘리트이다.
본 연구는 1790년대 제임스 매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해밀턴은 처음에 매디슨의 연방주의 행정부에 대한 반대가 개인적인 적대와 정치적인 이익 때문에 촉발된 것으로 믿었지만, 나중에는 매디슨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대로 공화주의자와 연방주의자 사이의 논쟁이 원칙의 차이로부터 기인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매디슨에게 공화주의는 여론의 절대적 지위와 참여정치의 긍정을 의미했다. 해밀턴은 좀 더 순종적인 시민의 역할과 좀 더 독립적인 정치엘리트의 지위를 지지했다. 매디슨은 정치지도자와 계몽된 사람들이 여론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긴 했지만, 여론을 정부에 대한 신뢰로 만 간주하는 해밀턴의 개념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오늘날의 참여 민주주의와 적절히 어우러지고 있는 미국 공화주의는 1791년부터 1792년 사이 공화국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이며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여론의 중요성에 철학적, 이론적 변론을 제공한 매디슨의 기여가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