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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 저자명 : 2012-06-01 15:49:32
발행연도 : 2010 통권 :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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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본 연구에서는 한국 선거제도의 기원과 변동을 역사적 기록물이나 신문 기사, 주요 정치적 행위자의 기록 등을 기초로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본 연구에서는 선거제도의 변화가 선거환경의 변화와 정치적 행위자들의 동기가 결합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로고스키(Rogowski)에 논의에 주목하여 정치환경의 변화와 정치적 행위자들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국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정치적 기원과 이후 2004년 1인 2표 혼합형 선거제도 도입 당시까지의 선거제도 변화 과정과 이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나타난 제도적 연속성과 단절의 문제, 그리고 정치적 행위자의 전략적 상호작용 문제 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본 연구의 분석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48년 제헌국회를 위한 선거법 제정 이래 모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먼저 1948년 제헌 국회를 위한 선거법 제정은 미군정과 우익 주도의 과도입법의원이 주도해 1차 입법의원선거법을 제정하지만, 유엔한국위원회에 의해 완전보통선거제로 수정이 이루어진다. 이 선거법의 제정과정에서 1인 소선거구 단순다수제가 처음으로 도입되는데 이는 미국의 선거제도를 모델로 한 것으로 미국과 우익이 좌익 세력을 배제하고 우익의 권력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북한과 소련에 대한 미국과 남한의 우위를 학보하고 단정 체제 수립에 보다 많은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선거제도가 모색되었다.

1957년 1차 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발췌개헌을 배경으로 하며 특히 야당인 민주당은 2인 중선거구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야당이 공명선거를 명분으로 중선거구제를 내세운 것은 사실 선거구제 개편보다는 선거구 증설을 통해 의석을 확대하는 한편 야당이 선거법 협상 과정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적 성격이 강했으며, 선거구제 개편은 결국 여당에 반대로 무산 되엇다. 또한 1960년 제2공화국이 성립된 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자 여야 일부, 특히 제3당인 신민당이 추진한 중선거구제 개편 역시 1960년 5․16 군사쿠데타를 맞으며, 논의가 좌절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세력은 1963년 공명선거와 정치적 안정화를 명분으로 1인 소선거구제에 전국구를 병행하는 선거제도를 도입하는데 이는 군부 쿠데타 세력의 정권 안정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부세력은 초기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중선거구제를 추진하지만 여당의 안정적 우위가 보장되지 않으면서 이를 포기하기도 한다. 또한 1971년 여당인 공화당은 대선과 총선에서 야당이 약진하고, 이에 따라 장기집권을 위한 안정 의석이 위협 받는다는 판단 아래 중대선거구제를 추진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1972년 대통령이 추천하는 유신정우회 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2인 중선거제를 실시하여 장기집권체제의 기반을 마련한다. 1979년 박정희가 살해당하고 1980년 소위 민주화의 봄의 도래하면서 백가쟁명식의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쏟아져 나오지만, 이 역시 1980년 5․17 군사 쿠데타에 의해 좌절되고, 신군부 세력은 기존의 중선거구제를 유지하면서 유신정우회 제도를 폐지하고 여당에게 2/3가 보장되는 전국구 의석을 도입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다.

1987년 6․29 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민주화 이후 민자당, 민주당, 평민당, 공화당 등은 선거법 협상을 하지만 각 당은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각기 서로 다른 중대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를 제시하면서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여당인 민자당 단독으로 1인 소선거구제에 전국구 제도를 병행하는 선거제도를 관철시킨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의 과정에서 민자당은 정계 개편을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추진하지만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내의 반대에 부딪혀 역시 무산된다. 한편 평화적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후인 1999년에는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중대선거구제를 추진하지만 야당의 반대로 이를 포기하고 대신 1인 2표 권역별 비례제를 추진하지만 이 역시 무산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집권전 소선구제를 주장했던 국민회의가 중대선거구제를 추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2004년 1인 2표 혼합선거제도의 도입은 매우 흥미를 끄는데, 이는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헌법재판소라는 새로운 주체가 선거법 개정을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시민사회와 전문가, 그리고 각계 대표가 선거제도 개편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편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언급했듯 모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있었다. 둘째, 이들 논의의 거의 모든 주체는 정치권이었고, 정치권이 제시한 선거구제 개편 방안은 모두 정략적 이해관계의 산물이었다. 셋째,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실제 선거구제 개편으로 이어진 것은 거의 모두 헌법 개정과 함께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이 가운데 민주화 이후인 1988년 선거법 개정을 제외하면 모두 헌정 중단 이후 정치권력이 군부세력에게 독점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넷째, 선거법 개정이 헌법 개정과 함께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듯 선거구제 개편은 대통령 권력의 안정성 확보 내지 대통령 선거 승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민주화 이후1988년 선거법 개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선거구제 개편과 관련한 선거법 개정이 헌정 중단과 연결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선거구제 개편이 각 정파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기보다 특정 정파의 힘의 우위 속에서 관철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실질적인 빌미가 되었다. 여섯째,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추진한 주체는 다양하지만 이들 모두 전략적 이해관계를 뒤로 감춘 채, 공명선거 정착, 혈연․지연 등의 연고주의 타파, 지역구도 타파 등 선거구제의 본질적 다소 동 떨어진 것을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명분으로 삼았다. 일곱째, 여당의 경우 안정적 지위가 위협받을 때 적극적으로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주도했지만, 야당의 경우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시작했고 이 역시 실질적인 선거구제 개편을 목표로 하기보다 선거법 협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시도인 경우가 많았다. 여덟째, 1948년 1인 소선거구 단순다수제가 도입된 이래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제기된 선거제도의 개편방안은 단기이양식의 중대선거구제이다. 단기이양식 중대선거구제가 이처럼 주목받은 것은 한편으로는 1인 소선거구제의 제도적 경로의존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진보․개혁 세력이 제도권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던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첨부1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동학(김영태).pdf(1.6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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